어려운 가정형편에도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어린이들에게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주는 기부 릴레이 ‘크리스마스 100일의 기적’이 시작됐다. 경기도 성남의 초등학교 5학년생인 이건희군이 “홍명보 감독님 만나고 싶어요”라고 적힌 스케치북을 들어 보이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경기도 성남의 초등학교 5학년 이건희(12)군은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축구할 때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타깝게도 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1년 전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넘어져 왼쪽 다리를 크게 다쳤기 때문이다. 부상 직후 병원에 실려가 다리에 철심을 박는 큰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경과가 좋아 지난 14일 2차 수술을 받고 철심을 빼냈다. 이제 수술받은 자리의 실밥을 풀고 다시 뛸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건희군은 뛰진 못하지만 TV 축구중계는 빼놓지 않고 봤다. 지난달 런던 올림픽 남자축구 동메달 결정전에서 한국 대표팀이 일본을 꺾고 한국 축구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따는 장면에선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고 했다. 그날 이후 그에겐 한 가지 간절한 소원이 생겼다. 홍명보 감독을 만나 직접 축구 지도를 받는 것이다.
건희군은 “축구에서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은 골키퍼”라며 “홍 감독을 만나면 대표팀 골키퍼 이범영 선수가 영국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몸을 날려 상대팀의 강슛을 막아내는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커서 사회복지사가 되는 게 꿈”이라며 “언젠가 어른이 되면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건희군이 방과 후에 공부하는 성남 힘찬지역아동센터 조은영 시설장은 “건희군이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씩씩하게 이겨낸 게 너무 대견스럽다”며 “부상으로 몸이 좋지 않은 와중에도 어린이봉사단에 참여해 봉사활동을 열심히 했던 참 착한 아이”라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에 사는 초등학교 2학년 김지영(8·가명)양은 장래에 사진작가가 되는 게 꿈이다. 방과 후 공부방에서 친구들과 현장학습을 가는 날이면 선생님에게 카메라를 빌려 사진 찍는 연습을 한다.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친구들의 모습도 찍고, 꽃·나무·벌레 등 다양한 동식물도 카메라에 담는다. 지영양의 간절한 소원은 자신만의 카메라를 갖는 것. 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카메라를 사달라는 말을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낡은 휴대전화에 폰카가 있긴 하지만 사진을 찍어도 화면이 흐리거나 깨져 나와 속상하기만 하다.
지영양은 “카메라가 생긴다면 가장 먼저 공부방 선생님들의 얼굴을 찍어 편지와 함께 드리고 싶다”며 “공부방에서 내가 찍은 사진들로 작은 전시회도 열고 싶다”고 했다. 지영양이 다니는 광주 나들목지역아동센터의 김오례 센터장은 “지영양이 어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모습을 어린이의 순수한 눈으로 관찰해 사진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감동이 느껴질 정도”라며 “지영양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최대한 격려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온라인 기부 … 1만원이라도 상관 없어
홍명보
홍명보 감독을 만나고 싶은 건희군과 카메라를 갖고 싶은 지영양처럼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내일을 향해 꿋꿋이 나아가는 어린이들에게 한 가지씩 가슴속 소원을 들어주기 위한 ‘기부 릴레이’가 시작됐다. 저소득층 아동지원 네트워크인 ‘드림투게더’가 진행하는 ‘크리스마스 100일의 기적’이 그것이다. 해마다 연말에만 반짝 관심이 높아지는 기부가 아니라 크리스마스 100일 전부터 어려운 환경의 어린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차근차근 기부를 실천하자는 캠페인이다.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은 드림투게더 홈페이지(idreamtogether.org)나 페이스북에 들어가 기부금을 내면 된다. 단돈 1만원이라도 상관없다. 적은 금액이라도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자는 취지다. 혼자 참여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친구나 지인 두 명에게 동참을 권유하자는 아이디어도 내놨다. 기부 릴레이를 널리 확산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홈페이지의 추천하기 메뉴를 이용하면 참여를 권유하는 문자메시지를 무료로 보낼 수 있다.
이렇게 모인 기부금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 보내져 연말에 해당 어린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데 쓰이게 된다. 캠페인 참여자들은 12월 22일 열리는 ‘꿈이 이뤄지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된다. 이날 어린이들에게 주는 선물은 기부자들의 이름으로 전달된다.
건희군의 소원을 들은 홍명보 감독도 "연말에 함께 축구공을 찰 수 있게 건희군이 빨리 회복했으면 좋겠다”며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같은 취지가 알려지면서 여러 기업과 사회단체의 참여도 줄을 잇고 있다. 이미 KT·KBS·대명리조트·매일유업·하나투어·한국건강관리협회·베스티안 화상후원재단·비룡소·세브란스병원·엘리트학생복·이스트소프트·일성건설·정철영어TV·지산교육·캐논코리아·코리아보드게임즈·타임즈코어·한국가이던스·함소아한의원 등 20여 개 기업과 단체들이 동참을 약속했다.
이들 기업은 어려운 환경의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일정액의 기부는 물론 각자 맞춤형 서비스도 내놓을 예정이다. 가족여행을 원하는 어린이에게 대명리조트는 콘도를, 하나투어는 여행상품을 지원해주는 식이다. 병원들은 치료의 기회를, 출판사는 어린이들이 원하는 책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제공할 계획이다.
어린이들의 사연과 소원은 드림투게더에서 전국의 지역아동센터를 통해 모으고 있다. 지역아동센터는 과거 저소득층 아동들을 위한 지역 공부방이 아동복지법에 의한 복지시설로 바뀐 곳이다. 지역사회에서 돌봄이 필요한 어린이들을 모아 가정집 같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보호·교육하고 건전한 문화체험과 놀이의 기회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21일 현재 16건의 아동 사연과 소원이 선정위원회를 거쳐 ‘크리스마스 100일의 기적’의 대상으로 확정됐다. 주최 측은 계속해서 어린이들의 사연과 소원을 모아 홈페이지에 소개할 계획이다.
강원도 춘천에 사는 11세 남자 어린이는 “올겨울 따뜻한 보금자리가 생기면 좋겠다”고 한다.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와 살고 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데다 집도 낡아 고민이란 사연이다. 전북 전주의 12세 여자 어린이도 부모의 이혼 후 할아버지·할머니와 살다가 얼마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셋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에게 “학습용 로봇이 있으면 좋겠다”는 게 소원이다.
경북 안동의 12세 여자 어린이는 연극배우가 되는 게 꿈이다. 하지만 공연장을 찾기엔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렵다. 이 어린이의 소원은 “연극 공연을 보고 연기 지도도 받는 것”이다. 대전의 다문화가정에서 자라난 7세 여자 어린이는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책가방과 학용품이 필요하다”는 사연을 전해왔다. 충남 천안에 사는 13세 어린이는 가정 형편상 학교에서 먼 곳으로 이사하게 됐다. 이 어린이는 “등하교를 위해 자전거가 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신청했다.
드림투게더 간사를 맡고 있는 KT 사회공헌(CSR)팀의 이종일 매니저는 “ 우리 주위에는 어려운 환경 때문에 꿈을 잃어버린 어린이들이 많다”며 “이런 어린이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온라인 기반의 기부 캠페인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약속 지킨 홈런왕 베이브 루스
미국에선 전설적인 홈런왕 베이브 루스(1895~1948년)와 조니 실베스터란 소년의 일화가 유명하다. 1926년 10월 열한 살 소년 조니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었다. 소년의 가족은 루스에게 긴급 전보를 쳤다. “죽어가는 소년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사인공을 부탁합니다.”
당시 루스가 속한 야구팀인 뉴욕 양키스는 그해 미국 프로야구 챔피언을 가리기 위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7전4선승제의 월드시리즈를 치르고 있었다. 소년에겐 양키스와 카디널스 선수들이 사인한 공 2개와 함께 루스의 친필 메모가 항공우편으로 급히 전달됐다. “이번 수요일 너를 위해 홈런을 쳐주마.” 루스는 소년과 약속한 대로 카디널스와 겨룬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홈런을 세 개나 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경기 직후 미국 언론들이 “소년의 증세가 기적적으로 좋아졌다”고 보도하면서 이 일화는 미국 전역에 알려졌다. 월드시리즈가 끝난 뒤 루스는 소년을 직접 찾아가 손을 맞잡으며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나중에 소년은 미국 동부의 명문 프린스턴대를 졸업하고 해군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다. 이후 중견 제조업체 사장을 지낸 뒤 74세까지 살았다. 이 같은 일화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전 세계에 잔잔한 감동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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